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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승화, “홀로움”
하트스캔 마인드스캔 클리닉 김연희
앞서 살펴보았던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소외되고 추락하는 아버지 상은 40-50대 중년의 남성에게서 흔히 보이는 모습니다. 40-50대는 전통적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남성이 사회적으로는 경력이 쌓여 어느 분야의 핵심 중추가 되는 시기이다. 직급으로 치면 부장 정도 되며 입사 초기의 부푼 포부대로 이사로 승진하느냐 명예퇴직을 하느냐 기로에 놓여 있다.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 사랑의 호르몬은 유효기간이 지나 부부관계는 권태기에 들어섰고, 자녀들도 10-20대에 접어들어 정신적 독립을 주장할 시기여서 소위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를 겪게 된다.
독일의 문명 비평가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남자–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에서 남성의 중년의 위기를 유머와 위트 넘치게 묘사한다.
“대부분의 남자는 젊었을 때 자신의 존재를 영웅적 삶으로 계획하는데, 이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식함으로써 중년의 위기가 초래된다. 그의 심리는 축구경기에서 종료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골을 넣게 위해 다급해진 선수의 심리와 통한다.......그가 행하는 최후의 절망적인 시도는 인생의 전환을 위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여 이를 공급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직업적인 연쇄살인을 일으키거나, 좀 더 일반적으로는 기존의 사적인 유대관계에서 벗어나는 탈선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녀들은 남편들이 마지막으로 한줌의 테스토스테론을 찾아 나섰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종국적으로 확인하는 처절한 감정은 각자가 원래 의도했던 남자로서 존재했던 적이 결코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러한 남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한다.”
인생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 재평가하고 새로운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위기를 성숙하게 넘기면 좋겠지만 비틀대는 경우가 있다. 위 책에 묘사된 것처럼 “마지막 한줌의 테스토스테론”을 찾아 나선 남편 때문에 부인이 홧병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실을 찾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려 내과를 찾았던 B 부인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분노와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상담 내내 격앙되고 흥분된 어조였다. B 부인은 겉보기에 대기업 이사인 남편, 명문대 다니는 엄친아를 둔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지만 최근 말 못할 고민이 생겼다. 회사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동반 모임에서 항상 빛이 났던 미모의 B부인에게 학벌도 외모도 부인에게 한참 못 미치는 평범해 보이는 여자에게 남편이 빠졌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고 용납할 수도 없는 수치였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아름답고 젊은 다이아나 왕비를 제쳐두고 이혼녀에 연상인 커밀라 파거 볼스에 빠지는 것과 유사한 이런 심리에는 다 이유가 있다. <왕의 정부>의 저자 엘리노어 허먼은 “왕들은 자신의 치세에 관해 절친한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 했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 편한 대화 상대를 원했다”고 분석한다. 왕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중년의 위기에 몰린 남성이라면 언제든 이런 달콤한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진료실에서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이런 경우 영화에서는 치명적이고 아름답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재연드라마 <사랑과 전쟁>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어 이혼 법정에 서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외로움은 비단 아버지만의 것이 아니다. 2014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4가구 중 1가구가 1인 가구라고 하며 2012년 한국의 사회동향 보고서에서는 2050년에는 전 가구의 3분의 1인 37%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1인 가구에는 배우자를 잃고 홀로 된 노인 뿐 아니라 아직 짝을 찾지 못한 젊은 독신가구가 포함되어 있다. 경제위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88만원 세대와 삼포(연애,결혼,출산) 세대를 넘어서 오포(내집마련, 대인관계) 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현실은, 외로움이 결국 전 세대를 아우르는 현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외로움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 게 현명할까?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완벽한 대상을 찾아 헤매고 매번 뒤통수 맞으며 눈물 흘리기를 반복하는 A양은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다. A양을 볼 때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시대적으로 중요한 과제이지만, 또 한편 존재론적으로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시인 황동규는 쓸쓸하고 초라한 외로움이 아닌 혼자 있을 때 문득 찾아 온 기쁨으로서의 외로움, 황홀해서 홀로 환해진 외로움을 “홀로움”이라는 자신만의 시어로 표현했다. <버클리 풍의 사랑노래>라는 시집에 처음 소개된 “홀로움”은 시인이 버클리대 방문교수로 있을 무렵 느꼈던 외로움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시어였다.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설명할 적절한 언어를 창조해내면서 외로움의 시간을 창의적으로 채워 간 시인. 외로움에 매몰되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궁극에는 초월해버리는 경지, 외로움의 승화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홀로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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