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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울증과 자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2.11
첨부파일0
조회수
2570
내용

우울증과 자살

 

하트 스캔 마인드 스캔 클리닉

정신과 전문의 김연희

 

진료시간이 끝나 갈 무렵 A양이 급하게 찾아와 늘 그러 듯 생긋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예약했던 진료일을 3주 지나서였다.

A양은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는 모델이며 겉으로는 밝고 항상 웃으며 수다 떨기를 즐기는 여느 20대 건강한 아가씨지만, 3년여 동안 뇌졸중으로 중환자실에 누워만 있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몸도 지치고 마음은 항상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다. 짜증이 늘었고 가장 가까운 남자친구에게 화를 풀어오다가 결국 남자친구와 사이가 소원해져 헤어지게 되었다. 3개월 전 처음 내원했을 때 A양은 지속적인 피로감과 과수면, 폭식, 우울한 기분과 죄책감(어머니의 와병이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아 했다.), 기억력과 집중력 저하, 자살 사고(“엄마도 의식이 없어 돌아가신 거나 마찬가지인데 살아서 뭐하나”)로 괴로워하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였다. 하지만 환자는 스스로 우울증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저 전보다 소화가 잘 안되고 변비와 설사가 교대로 심해서 혹시 장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내과에서 내시경 검사를 한 후 아무 문제가 없어 스트레스성 위장질환으로 정신과에 의뢰되었다. 정신과에서 치료 받는 다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던 환자는 상담을 통해 그동안 말 못했던 고민을 털어 놓으며 마음이 후련 해 지기도 하고 약을 먹으면서 과민성 대장 증후군도 호전이 되고 피로감도 덜 해져서 치료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라는 말을 하더니 진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전화도 없었다.

그러던 그녀가 다시 나에게 헐레벌떡 찾아 온 이유는 가까운 친구가 얼마 전 자살을 해서 충격을 받은 때문이었다. 가끔 만나면 서로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넉두리가 통하던 사이인 친구가 말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죽음을 택해서 환자는 매우 안타까우면서도 겁이 더럭 났다고 한다. 우울증이 심했을 때 자신도 그 친구와 함께 죽음을 아무 두려움 없이 이야기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치료를 받으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엷어질 무렵 친구의 갑작스러운 자살은 환자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셈이다. 충분한 치료를 끝내기 전에 약을 중단하니까 다시 예전의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시작된 것도 치료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했다.

 

우울증의 발병 원인으로 가장 신뢰되고 있는 것은 스트레스-취약성(stress-diathesis) 모델이다. 다양한 심리사회적인 스트레스 요인(과중한 업무, 실직, 실연, 사별, 경제적 어려움 등)과 정서적인 민감성이라는 기질적인 특성(유전적 소인)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다. A양의 경우 어머니가 회복 불능의 상태로 중환자실에 기약 없이 누워계시고 의지하던 남자친구마저 떠나간 현실이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모델이라는 직업 특성에서 보듯 패션 감각이 뛰어난 환자는 불안, 우울, 화 등의 감정을 더 깊고 진하게 느끼고 표현하는 기질을 타고난 면이 있었다.

 

A양의 경우 진단을 내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비록 주된 호소 증상은 위장관계 증상이었지만 우울감, 피로감, 죄책감, 수면장애, 식욕변화, 반복적인 자살 사고 등 전형적인 우울 증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울증은 참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정신과 진료실을 찾아오는 우울증 환자들은 많은 경우 나 우울합니다라고 오지 않는다. 청소년들 같은 경우는 갑자기 성적이 떨어진다거나 안하던 술이나 담배를 배우고 부모에게 반항을 하거나 인터넷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비행을 저지른다. 감정 표현이 서툰 한국의 성인 남자들은 전보다 짜증, 화가 더 나거나 갑자기 성기능이 떨어지고 건강에 대한 염려가 늘어나 여러 병원을 다니며 검사를 해보기도 하고 건망증이 심해진다고 호소한다. 성인 여성의 경우도 이유 없이 몸이 아프고 기력이 없고 만성 두통, 어지럼증 등 신체 증상으로 우울증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노인의 경우는 집중력과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면서 치매가 아니냐고 찾아온다. 이러한 경우들을 가면 우울증이라고 한다.

 

가면 우울증의 경우 가장 심각한 결과가 갑작스러운 자살이다. 주변 사람들은 환자의 증상이 우울증 때문이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하고 그저 사춘기를 남들보다 심하게 겪나 보다 라거나 갱년기라 성기능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기가 약해서 보약을 지어 먹어야겠다고 결심하거나 치매기가 있다고 자가 진단을 한다. 우울감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가면 우울증도 적절한 치료기회를 놓치게 만들지만 정신과 치료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도 자신의 어려움을 주위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적극적인 도움을 구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정신과는 정신이 없는소위 미친사람이 가는 과이고 약물 치료를 받으면 평생 약을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잘못된 생각들이 치료를 주저하게 만든다. 결국 환자는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 울면서 혼자 괴로워 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정신의학적으로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이다. 70% 이상의 자살이 우울증으로 인한 인지적 왜곡으로 현실을 더 절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등 판단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감행된다. 이런 현상은 신경생화학적인 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환자들은 실제로 뇌 전전두엽의 뉴런(신경세포)의 수가 일반인 보다 적으며 이로 인해 뇌 세포 사이의 정보전달(감정, 생각 등을 조절)을 해주는 세로토닌을 만들어 활용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낮은 세로토닌 농도는 충동적인 성향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이 자살 충동을 강하게 느끼는 원인의 하나로 제기되고 있다.

 

우울증에 취약한 기질적인 소인을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최근 현대 사회는 심리사회적인 스트레스 요인(경제적 양극화, 핵가족화로 인한 심리적 지지구조의 약화, 과도한 경쟁사회 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우울증이 증가하고 있다. 동반하여 자살율도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자살율이 21.5(2006년 기준, OECD 평균 11.2)으로 2001년의 15.1명과 비교할 때 42%나 증가했다.

 

대부분 우울증에 의한 자살은 예방이 가능하다. 우울증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약물치료, 정신치료적 접근이 초기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면 자살은 예방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혹시 혼자 마음고생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알아보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 보자.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마음의 감기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폐렴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조기에 예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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